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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장애인의 본질은 사회환경이 만든다2008-03-12
작성자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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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본질은 없다②

얼마 전 장애인단체의 행사에 나갔다가 어느 20대 장애여성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필자는 그 여성에게 “옆에 휠체어를 타고 있는 여성은 필자의 먼 친척이에요”라고 하자 그 여성은 “어머 그럼 친척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하겠어요. 집안에 장애인이 둘씩이나 있다고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아니 그 쪽도 장애인이면서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장애인들이 무슨 문제가 있는 존재 인가요”했더니 그 여성 왈 “아뇨. 비장애인들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자나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자신도 장애인이면서 비장애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왜 장애인들 까지도 아무런 거리낌이 행동하고 있을까. 장애인의 본질이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의문을 풀어보려 지난번 칼럼부터 장애인의 본질에 대해 애기해 오고 있다. 과연 이사회에 수천만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장애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장애인의 본질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는 비장애인을 표준인간으로 간주하고 장애인들은 결함 있는 비표준인간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과연 이것을 장애인들까지도 객관적인 진실로 인정해야 타당한가.

우리사회의 통념은 장애인은 도와줘야 할 존재, 사랑으로 감싸 안고 가야 할 사람들로 생각하고 있으며, 많은 장애인들도 비장애인들은 죽어도 모르는 장애인들만의 아픔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사회나 장애인 자신들도 장애인은 본질적인 아픔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각종 미디어에서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장애인들이 저마다 비장애인들은 절대로 느낄 수 없는 본질적인 아픔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수학이나 과학 같이 어느 나라에 가서도 변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한 과학자가 자신이 발견한 이론을 증명하려고 똑같은 실험방법으로 한국에서는 성공하고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실패를 한다면 그 과학자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그 이론은 과학적인 진리가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난다.

마찬가지로 장애인은 누구나 본질적인 아픔이 존재 한다면 미국이나 일본 서유럽 같은 복지 선진국이나,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복지후진국의 장애인들 모두 똑같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많은 장애인들이 미국이나 서유럽 같은 나라에 가면 장애를 잘 느끼지 못하겠다고 한결같이 합창을 할 까. 왜 장애인들이 베트남이나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에 가면 한국에서 보다 장애의 아픔을 더 많이 느낀다고 할까.

이것은 미국이나 서유럽은 장애인의 복지체계나 사람들의 인식이 높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살기에 불편함이 적을 수밖에 없고 장애인들이 느끼는 아픔 또한 작게 느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로 베트남이나 방글라데시의 장애인들은 장애인 복지체계나 국민들의 의식이 한국보다도 떨어지기 때문에 현지에 사는 장애인이나 그곳을 방문한 외국장애인들도 훨씬 많은 아픔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즉 한국에서 유럽이나 동남아를 다녀온 장애인들이나 현지에 사는 장애인들이 느끼는 감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들 애기를 하는데, 이것은 장애인의 본질적인 아픔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환경이 장애인의 본질을 결정 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흔히들 장애인 하면 지체장애인, 시각장애인, 지적장애인 같이 고정적인 장애 유형을 갖고 있는 사람들만이 장애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장애인의 유형이나 모습은 특별하게 정해진 사람들이 아닌 각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장애인이 될 수도 비장애인으로 분류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비장애인 20대 여자라도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려 한다면 그 비장애인 여성은 바로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과 비슷한 처지가 될 것이다. 또 젊은 비장애인 남성이라도 무거운 짐을 가졌을 경우는 마찬가지의 입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노인들도 젊은 시절에는 계단을 뛰어오르기도 했었을 테고 깨알만한 글씨도 척척 읽어 내려갔겠지만 세월의 가면서 장애인들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먼저 찾는 사람이 되고 신문을 돋보기를 이용해 볼 수밖에 없는 시각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필자처럼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라 할지라도 도로나 건물에 휠체어가 다니기 좋도록 경사로나 엘리베이터 등이 잘 갖추어져 있다든가 청각장애인들도 모든 시설에 수화통역사가 의무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각종 미디어에서 자막, 수화로도 볼 수 있게 된다면 자신의 장애를 별반 못 느끼며 살아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장애인이란 본질적인 아픔이 있는 존재도 아니고 비장애인 장애인을 구분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사회적 환경의 차이로 만들어지는 존재 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도 각종 미디어에서는 장애인을 묘사할 때 사회적 환경이나 개인의 특성은 무시하고 오로지 장애의 아픔에만 초점을 맞춰, 장애 때문에 무엇을 못하는지, 주변 사람들이 장애인을 위해 어떤 희생이나 도움이 필요한지에만 집중을 한다.

이러한 미디어의 태도는 평생에 걸쳐 5분 이상 장애인들과 대화초자 나눠보기 힘든 사회구조 속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에게 왜곡된 인식을 심어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디어속의 장애인들 모습이 전부인 비장애인들에게 “장애인들은 우리와는 달리 본질적인 아픔이 있는 존재이며, 우리사회가 이들을 보살피고 사랑해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라는 의식만을 각인시킨다. 장애인 비장애인의 본질은 따로 없다. 다만 환경의 차이에 의해서 정해 질 뿐이다.

출처 : 에이블뉴스<칼럼니스트 심승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