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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김 前대통령 서거] 암살.납치.사형선고... 5차례나 죽음 문턱에2009-08-18
작성자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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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인동초의 삶’처럼 일생 동안 숱하게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다. 그 스스로 “나는 일생에 5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2005년 특별강연)는 회고처럼 죽음의 목전까지 간 것만 5차례였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앞세운 대통령 후보로 화려하게 등장한 이후 그는 군독재 정권의 가장 위험한 ‘정적(政敵)’이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죽음의 위기는 50년 6·25 때 넘겼다. 당시 목포 흥국해운 사장이던 김 전 대통령은 정치범으로 목포 형무소에 두 달가량 수감됐다. 9월 말 서울 수복 등으로 패주하던 북한군은 당시 이들 정치범 100여명을 감옥에서 끌어내 총살을 시작했고, 20여명이 쓰러졌다.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전황이 갑작스레 급박해지면서 북한군이 그대로 철수했고, 김 전 대통령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감옥 문을 부수고 탈출해 목숨을 건졌다.

두번째부터는 야권의 대표적 정치인으로 넘겨야 했던 ‘암살’ 위기였다. 71년 5월24일 전남 무안군 국도에서 당한 교통사고가 첫 시도였다. 당시 목포지역 총선 신민당 후보 지원유세를 마치고 광주로 이동하던 중 그의 자동차는 중앙선을 침범해 돌진해 오는 14t 덤프 트럭을 피하려다 논에 쳐박혔다. 이 사고로 김 전 대통령은 팔과 다리 등에 중상을 입었다. 사고 트럭이 공화당 의원 소유인 데다, 사고 직후 운전사가 도주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공화당 측의 ‘정적 제거’ 의혹이 제기됐지만, 끝내 영구 미제로 남았다.

세번째와 네번째 위기는 한꺼번에 닥쳐왔고, 첫 암살시도 후 불과 2년 만이었다. 바로 중앙정보부가 ‘KT 공작’으로 이름붙인 김 전 대통령 납치 및 살해 기도다. 73년 8월8일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 전 대통령은 도쿄 한복판 그랜드팔레스호텔 복도에서 건장한 체격의 괴한들에게 납치됐다. 괴한들은 인근 방으로 끌고가 1차 살해시도를 하지만 여의치 않자, 마취시켜 정신을 잃게 한 뒤 안가로 이동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튿날 아침 코를 제외한 얼굴 전체를 화물포장용 테이프로 가린 채 대북공작선 용금호에 태워져 국내로 옮겨졌다. 이 과정에서 괴한들은 김 전 대통령의 몸에 추를 매달고 현해탄(대한해협)에 수장시키려 했지만, 미국 국무부의 다급한 개입과 한국 정부에 대한 압박으로 죽음을 가까스로 모면했다.

마지막은 80년 통한의 광주 민주화운동 때다. 정권탈취 계획을 진행하던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신군부는 비상계엄선포와 함께 광주 민주화운동이 김 전 대통령의 내란 음모에서 시작됐다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해 냈고, 그를 군사법원에 세웠다. 신군부의 회유를 거부한 김 전 대통령은 결국 1·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를 살린 것은 이번에도 국제적인 압력이었다. 당시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은 물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 등이 그의 구명에 나섰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은 이듬해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 인정을 의미하는 한·미 정상회담과 교환돼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매번 오뚝이처럼 부활한 그의 삶은 이제 85해를 마지막으로 영원한 영면으로 들어갔다.

* 경향신문 <김광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