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로 우리 기업은 본격적으로 글로벌 경쟁 환경에 노출되고 있다. 더 이상 국내시장에 안주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환경에 직면한 것이다. 격심한 경쟁 환경이 위기가 될 것인지 기회가 될 것인지는 오로지 기업이 어떻게 변화에 적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205년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의 다국적 기업 듀폰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 14개국을 경영하는 자리에 오른 김동수 아·태지역본부 사장(59)으로부터 글로벌 경쟁력에 대해 들어봤다.
# 글로벌 스탠다드
김 사장은 1965년 서울고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해 UC 버클리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대학졸업 후 한화그룹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한 그는 1987년 듀폰에 엔지니어로 입사, 공장장을 거쳐 1998년에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사장이 됐다. 듀폰 역사상 그 지역 출신이 사장이 된 것은 최초의 일이다. 국내 대기업과 글로벌 기업을 두루 경험한 김 사장에게 글로벌 스탠다드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부탁했다.
"글로벌 무대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기업의 몇가지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시간관리에 대한 개념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선약이 있더라도 나중에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생기면 먼저 한 약속을 변경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선약을 더 중시합니다."
그는 이와 함께 CEO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과거처럼 죽도록 시간만 투자해서 일하는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생활과 일의 균형을 유지하고 조직 전체의 시간관리를 위해서는 자신의 체력관리도 비즈니스의 연장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특히 회의를 주재할 경우 CEO가 직원보다 더 많이 듣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지식과 정보면에서 부하 직원이 CEO보다 월등하게 낫다는 것을 인정해야 조직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김 사장은 이외에도 한국 기업의 CEO들은 업무 효율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체면과 의전을 지나치게 따지는 구태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했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먼저 보일 때 경영진에 대한 신뢰가 생길 수 있고 이것이 고질적인 노사문제 해결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사장은 또한 글로벌 스탠다드가 반드시 서양 사람들의 기준을 맞추는 것이라는 강박관념에서도 자유로와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 사장이 정의하는 글로벌 스탠다드는 무엇일까. "글로벌 스탠다드는 특정한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고 경쟁력이 있는 여러 나라의 시스템과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브레이크 더 박스(break the box)
김 사장은 글로벌 기업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면서 성장했지만 어려움은 없었을까. "듀폰으로 와서 10년 정도 지나자 미국 직원만 5000명을 거느리는 자리에 올랐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인을 부하로 거느리는 것은 물론 미국인들 앞에서 영어로 연설하는 것 조차 두려웠습니다. 결국 서양에 대한 일종의 컴플렉스를 극복하자 모든 일이 쉽게 풀렸습니다."
엔지니어에서 경영자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김 사장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의 순간은 언제일까.
"공장장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어느날 본사 회장이 저를 상무로 승진시키면서 세일즈를 해보라는 미션을 부여했습니다. 엔지니어로서도 잘 살 수 있는데 굳이 세일즈에 뛰어들어야 하는가 심각하게 고민을 했죠. 그 때 제가 새로운 일을 선택할 수 있었던 원칙은 바로 `브레이크 더 박스`(break the box); 즉 `기존의 틀에 안주하지 말고 뛰쳐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김 사장은 이같은 선택이 인간적으로 매우 어려운 것임을 뱀이 허물을 벗는 것에 비유했다. 그만큼 성장과 성숙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 지속경영
듀폰이 200년 넘게 거대 글로벌 기업으로 존속할 수 있었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피부에 잘 와닿지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한다면 철저한 `윤리경영`입니다. 회사 구성원이 법과 규정을 어긴 이유가 설령 회사를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우리 회사는 결코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김 사장은 이와 관련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울산공장 공장장 시절이었습니다. 업종 특성상 환경 공무원의 단속에 걸려 고발을 당하는 바람에 검사 앞에 여러 차례 불려가 진술서에 도장을 찍어야했죠. 당시만 해도 대충 돈으로 때우는 분위기였는데 회사 규정상 부당하게 그러한 위기를 모면하는 것 조차 허용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사 돈은 단 10만원도 사적인 용도로 쓸 수 없을 만큼 엄격한 것 또한 듀폰의 기업문화입니다."
한국의 향후 20년은 기업을 비롯한 사회 전반의 모럴 스탠다드를 어떻게 만들어가느냐에 달려 있다는 김 사장의 마지막 이야기가 울림있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