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오리온그룹 창업주 故 서남 이양구 회장 ◇
파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너 자신이다 ⑥
아내와의 재회는 이양구에게 활력을 찾아줬고, 그는 새로운 사업을 찾아 부산 바닥을 뒤지고 다녔다.
이제는 홀몸이 아니다.
자신을 믿고 사선을 넘어온 아내가 있지 않은가. 그에게 사업 밑천이라곤 그동안 배운 상재(商才)와 건강밖에 없었다.
시장을 뒤지고, 사람을 만나고, 항구를 기웃거리며 새 사업을 모색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처음부터 난 빈손에서 출발했다 . 빈손으로 사업을 일으켰고 크게 성공도 해봤다 . 비록 지금은 다시 빈손이지만, 열심히 한다면 또다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 .’
자신감과 낙천성이야말로 진정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이라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이 그에게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주는 일이 일어났다.
51년 4월. 부산에 벚꽃이 한창일 무렵 그날도 하루 종일 시장을 뒤지고 다닌 이양구는 시장 구석 함흥냉면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때 그를 발견한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서울에서 식품사업을 하던 사람인데 부산에서 우연히 만나 가깝게 지내던 터였다.
“이 사장, 설탕이 들어 왔소! 설탕이 들어왔단 말이오.”
“무슨 설탕 말이오?”
이양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 새 잊어버렸단 말이오? 지난 여름 홍콩서 들여오기로 했던 설탕! 그게 이제야 들어왔단 말이오.”
“전쟁 나기 보름 전에 1200만원이란 거금을 주고 계약한 그 설탕!”
이번에는 이양구가 그 큰 손을 번쩍 들어 상대방의 손을 잡고 격하게 흔들었다.
“그게 사실이오? 어디로 말이오? 언제, 얼마나?”
“부산항이오. 오늘, 100만근이 다 들어왔다네요!”
이양구는 이내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가, 소중하게 간직해 뒀던 설탕 계약서를 꺼냈다.
보안대원에게 끌려가면서도 폭격을 맞으면서도 언제나 잊지 않았던 손때 묻은 계약서. 전쟁만 끝나면 재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간직해온 계약서였다.
한달음에 부산항으로 달려가 보니 낯익은 설탕업자들이 벌써 몰려들고 있었다.
당시 이양구와 계약한 무역회사 사장도 나타났다.
“여러분! 전쟁 때문에 제대로 들어오지 못했던 설탕이 이제야 들어왔습니다 . 그동안 운송이 지연돼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 전쟁 때문이긴 하지만 운송 지연에 대한 보상을 하려 합니다 . 여러분께 각자 계약하신 설탕 물량의 두 배를 드리기로 하죠.”
이양구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전쟁으로 빈손이 됐던 그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가 온 것이다.
하지만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계약자들이 일제히 회사의 제안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그 사이 물가가 10배나 올랐는데 겨우 두 배 받고 떨어지라고? 그렇겐 못하오.”
전쟁 중에 설탕을 비롯한 식료품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특수를 누렸다.
상인들로선 이런 호기를 놓칠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이양구는 계약서를 들고 그 무역회사로 찾아갔다.
“나는 저 사람들하고 담합하지 않을 거요. 당신들이 처음 제시한 대로 두 배만 받겠수다 .”
사장이 고마워하며 도장을 찍었다.
100만근의 절반에 가까운 40만근을 계약한 이양구가 이렇게 회사 조건을 받아들이니 담합했던 다른 계약업자들의 입지가 크게 흔들렸다.
“이 사장 어째서 설탕 값을 더 세게 부르지 않았소?”
한 동업자가 물었다.
이양구는 시원스럽게 대꾸했다.
“전시 상황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상황이 바뀌오. 그런 판국에 서로 잇속 챙기자고 속절없이 허송세월만 할 수 있겠소? 좀 더 이익 보자고 물건을 가지고 있다가는 둘 다 망합니다 . 그리고 어려운 시절에 먹을 것 가지고 그렇게 떼돈 벌 궁리하는 거, 너무 야멸치지 않습니까?”
참으로 이양구다운 호탕한 결정이었다.
100만근의 설탕은 이양구에게 소중한 사업 밑천이 됐다.
그는 다시 사업에 몰두했다.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 4시면 집을 나섰다.
국제시장을 돌며 그날의 물동량을 파악하고 자기의 보유량을 계산해 가격을 뽑아냈다.
이 모든 계산이 아침 6시가 되기 전에 마무리됐다.
그 날도 시장조사를 마치고 아침을 먹으러 영도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아니. 이게 누구야? 이 사장 아닌가?”
고개를 돌려보니, 서울에서 사업할 때 거래했던 심 전무라는 사람이었다.
“야! 심 전무님! 무고하셨군요. 그래,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어찌어찌 살아남아 장사하고 있지. 그나저나 마침 잘 됐소. 안 그래도 이 사장을 찾고 있던 참인데.”
심 전무가 다짜고짜 이양구의 팔을 잡아끌고 간 곳은 영도에 위치한 대한물산이었다.
대한물산은 당시 부산을 주름잡는 큰 무역회사였다.
김용성 사장이 반갑게 이양구를 맞았다.
“반갑소. 지난번 홍콩 설탕 얘기를 듣고 감탄했소. 마침 심 전무가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에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참이오. 젊은 친구가 대단하구만!”
“과찬이십니다 .”
“이 사장, 사실은 말이오. 우리가 대만에서 설탕 100만근을 수입하게 됐소. 그런데 믿을 만한 판매업자 구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라야지. 그러던 차에 이 사장 얘길 듣고 ‘이런 사람한테 맡기면 안심할 텐데…’라고 생각했소. 어떻소? 우리하고 계약을 해서 팔아보지 않겠소?”
“그러시다면, 맡겨만 주십시오. 열심히 한번 해보겠습니다 .”
■ 2년 만에 10억원을 거머쥐다 ■
‘홍콩 설탕 사건’에서 이양구가 보여준 사업 수완과 배포, 대한물산과의 판매계약은 그를 부산 일대에서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설탕왕’이란 별명으로 불리게 됐고, 판매를 부탁하는 회사도 줄을 서기 시작했다.
때마침 시기도 잘 맞아떨어져, 식료품 경기가 특수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사업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51년 5월, 이양구는 함흥 시절의 친구들인 주동태·조한용·최홍근과 함께 ‘삼양물산(三洋物産)’을 설립한다.
설탕과 밀가루를 대규모로 수입 판매하는 도매상 겸 무역회사였다.
얼마 후에는 부산을 중심으로 마산, 대구까지 판매망을 확대했다.
여세를 몰아 부산에서 제일가는 설탕 수입상인 ‘남창실업’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설탕사업을 하던 이양구는 제당사업까지 해보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단순히 남이 만든 상품을 가져다 팔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당기술이 없는 그로서는 섣불리 나설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의 ‘제일제당’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제당기술을 가진 업체였다.
경쟁자가 없는 시장인 데다 전쟁특수까지 겹쳐서 제일제당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미국에서 막대한 원조 설탕이 들어오고 수입 설탕까지 국내 시장을 파고들어온 것이다.
그래도 이양구는 제당업체의 미래를 밝게 봤다.
원조가 영원히 계속될 리도 없고, 정부가 수입 설탕의 시장 장악을 수수방관하지도 않을 것이라 예상한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제당사업을 시작할 적기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이병철 회장을 찾아가 동업을 제안했다.
“난 설탕을 만들 줄 모르지만 파는 재주는 쓸 만합니다 . 우리 둘이 힙을 합치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 대신 제일제당 설탕은 이양구가 독점판매하게 해주시오.”
이병철 회장도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소공동에 ‘한국정당판매주식회사’를 세우고 제일제당 설탕을 독점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54년 5월이었다.
두 달 후에는 자본금 100만원을 출자, ‘삼양제당공업’을 설립해 제당사업까지 손을 뻗쳤다.
그 무렵, 전쟁의 상흔은 깊었지만 원조물자의 영향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식생활에 일대 변혁이 일고 있었다.
과자와 커피를 비롯한 기호식품 소비가 늘어나면서 설탕 수요도 급증한 것이다.
명절이나 집들이 때 ‘설탕 한 봉지’는 최고로 환영받는 고급 선물이었다.
더욱이 국내에서 제당기술은 제일제당과 삼양제당공업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특수를 누릴 수있었다.
이런 사업적 성공으로 이양구는 당시 10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벌어들이게 됐다.
“앞으로 설탕 장사를 하시오.”
이양구는 야마다 사장이 얼마나 큰 선물을 줬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출처 : 매일경제[정리 = 김병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