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는것은 상품이 아니라 너 자신이다⑪ ◇
나룻배가 기슭에 도착할 때쯤 이 회장은 마음의 정리를 끝냈다.
“차 비서, 기자들한테 전화 넣게! 내가 저지른 일, 내가 해결하겠어. 빨리 인터뷰 준비하라!” 자신감을 되찾은 이 회장의 음성이 벼락처럼 울렸다.
이 회장은 인터뷰 당일 머리를 깔끔하게 올백으로 넘기고 어느 때보다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기자 : 동양시멘트 때문에 벌어진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 개인 소유 부동산은 물론 우량 기업인 동양제과까지 매각하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차피 기업을 정리해야 한다면 시멘트를 매각하는 게 더 이롭지 않습니까?
이양구 : 현재의 동양제과는 연간 매출액 30억원으로, 시멘트 사업보다 채산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시멘트에서 발단됐기 때문에 저는 문제의 해결도 시멘트를 통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일생에서 지금처럼 어렵고 고독하고 가슴 아팠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동양시멘트 였고, 또 시멘트는 우리나라 기간산업이기 때문에 불황인 시멘트로 다시 일으켜보고 싶은 도전의 심정이 앞섰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기업의 다른 것을 전부 정리하고, 시멘트를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기자 : 재산을 도피시켰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양구 : 저는 제가 사랑하는 두 딸에게, 남에게 피해를 준 것처럼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동양시멘트 사건이 터지고 나서 동양시멘트는 관계 기간의 내사를 받고 있습니다.
천지신명에게 맹세코 재산을 뒤로 빼돌렸다면 어떠한 심판도 달게 받을 것입니다.
기자 : 지금의 심정은?
이양구 : 저는 인간적으로 채권자들 편입니다.
이미 동양제과를 법률고문단에 일임, 매각해서 부채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기자 : 동양제과 매각에 있어서도 본인이 나서지 않고 법률고문단에 일임했는데 그렇게 하면 손해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양구 : 저는 장사꾼입니다.
제가 직접 나서면 아무래도 가격을 놓고 흥정을 벌이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할수록 매각도 늦어집니다.
그만큼 채권자들은 더 오래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도록 법률고문단에 일임한 것입니다.
선의의 채권자들에게 돈으로인한 어떤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도록, 부채를 다 갚을 때까지 신에게 기도할 것입니다.
인터뷰 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던 채권단 쪽에서 거꾸로 합의를 제의해 온 것이다.
‘나는 인간적으로 채권자들 편’이라는 이 회장의 진심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결국 변제 기간을 2~3년간 연장하고, 월 3.5% 지급하던 이자도 2.5%로 내리기로 했다.
채권자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으려 한 기업가적 양심이 자신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을 살린 것이다.
22살 때 대양상회를 설립하면서 시작된 이양구의 기업가적 삶 전체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직과 신용’을 실천했다.
돈을 빌려준 선의의 채권자들과, 그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직원들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자신의 집과 동양제과까지 선뜻 내놓겠다는 그의 결정에서 ‘기업가는 돈만 버는 사람이 아니다’는 이양구식 삶을 느낄 수 있다.
그의 말처럼 ‘기업은 사회의 구조적 심장이며 국가를 재건하는 뿌리’라는 것을….
동양시멘트 여파로 사세가 위축됐던 동양제과는 80년도에 시장점유율 20%를 기록하고, 제과업계 3대 메이커 중 하위에 머물렀다.
■ 서해안 시대를 준비하다 ■
‘제과에 너무 소홀했어. 이제 시멘트도 안정됐으니 제과를 키워야지.’
81년, 이양구 회장은 동양제과 사장에 취임한다.
그가 내 건 목표는 공장 확대, 시설 현대화, 기술 도입, 판매망 확립 등이었다.
익산 공장 사업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됐다.
부진을 만회하려는 이 회장의 열정은 대단했다.
새로운 기기의 도입과 증설이 추진되고, 신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품질을 높이고 사세를 확장하기 위해 대구 공장 건립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증설이 시작됐고, 외국 기술자를 초빙해 선진 제과 기술을 습득해갔다.
이 회장은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최신식 초콜릿 생산공장을 세우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전북 익산시 영등동에 총 1만4000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6700평 공장 및 창고 후생동을 세울 예정이었다.
공장 건설에만 150억원이 들어가는 대공사였다.
타당성 조사를 한 서울대팀이 비전이 있느냐며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반대 의견을 뿌리치고, 일본·스위스·미국·덴마크 등지를 돌며 기계를 발주하는 등 정열적으로 일했다.
익산 공장에 대한 이 회장의 애정이 각별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회장은 평생 동안 한 번도 공장을 신설한 적이 없었다.
삼척 동양시멘트 공장도 인수했고, 심지어 본사 사옥도 임대했다.
원래 부동산투자를 사업가의 본분으로 여기지 않았고, 여유자본이 있으면 시멘트나 제과 증설에만 신경 썼다.
평생 처음 자기 손으로 신축건물을 짓게 된 이 회장의 흥분은 여간 아니었다.
“아, 글쎄 100미터는 넘어야지!”
81년 11월, 익산 영등동 벌판에서 억센 함경도 억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설계도를 흔들면서 소리치는 사람은 러닝셔츠 바람에 선글라스를 쓴 이양구 회장이었다.
양송이공장을 인수해 기존 건물을 헐어내고 새로 3층 규모의 제과공장으로 바꾸는 대공사가 한창이었다.
상대는 일본 모리나가사의 기술고문 오다씨였다.
그 옆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는 이는 공장설계 자문역인 스위스 인 맥스 브락씨. 이 회장은 굵은 목에 걸친 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으며 브락씨를 몰아세웠다.
“이보오, 브락씨! 과자 라인이 짧아야 된다는 법이라도 있소? 유럽에서는 라인을 이렇게 길게 설치하지 않는단 말이오? 어디 한번 말해 보시오!”
“유럽과 한국은 사정이 다르지요. 유럽은 초콜릿이 생필품이나 마찬가지지만 한국에서는 원체 비싼 과자 아닙니까?”
“아, 그건 걱정 마오! 한국은 엄청나게 빨리 발전하고 있단 말이오. 이제 국민소득 2000달러 시대가 코앞이오. 지금 당장 푼돈 아끼는 짓은 못하오. 미래에 다가올 엄청난 초콜릿시장을 대비할 거란 말이지. 유럽식으로 라인을 좀 시원스럽게 쫙쫙 설치합시다 . 최소한 110미터는 돼야지.”
이번에는 동양제과 임원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회장님, 현재 동양제과 매출이 500억원 선입니다 . 그러니 40~50%를 높여서 700억원내지 800억원 정도로 잡고 설치하는 게 무난합니다 .”
“야, 시시한 얘기 마라. 700억원 팔자고 장사하니? 1000억원은 바라 봐야지! 브락씨, 나는 이 공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 것이오.”
“왜 서울이나 수도권을 놔두고 굳이 익산에다가 공장을 지으십니까? 교통 편한 구로나 영등포 쪽이 좋다는 의견이 많던데. 올해부터 만들 ‘다이제’는 비싼 과자 아닙니까? 같은 과자를 만드는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동행자 중 한 명이 문제를 제기했다.
이양구는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같은 과자라니? 과자는 공기와 물이 중요해. 그런데 공해가 심한 영등포에서 만든 과자하고 물 좋은 익산에서 만든 과자가 어떻게 같을 수 있어?”
“그럼 순전히 과자 맛 때문에 익산에 공장을 세운단 말입니까?”
“그딴 소리 하지 말고, 저길 좀 보라.”
이 회장은 달리는 차 밖으로 출렁이는 서해를 가리켰다.
“이제 저 서해가 아주 큰 길이 될 거야. 중국이 이제 곧 개방한단 말이지. 지구인 4명 중에 하나가 중국인이야. 그런 중국이 문을 열면 세계 경제 질서가 바뀌지 않겠어? 제과시장도 무진장 열릴 거니까 대비해야지. 군산항까지 가까이 있으니 얼마나 매혹적이네?”
“그게 대체 가능하겠습니까?”
“길어도 10년 안에 수교가 될 거야, 그럼 대기업이 제과 사업에 뛰어들겠지.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 우리가 지금 규모를 키우지 않으면 안 돼. 생각해 보라. 10억명의 소비자가 기다린단 말이야.”
“중국이 공산주의를 포기하겠습니까?”
“중국인은 타고난 장사꾼이야. 화상들을 보면 모르니? 절대로 이데올로기 때문에 경제를 포기할 민족이 아냐. 두고 보라. 미국을 능가하는 진짜 큰 시장이 열릴 테니, 우리 동양이 큰 시장에서 승부를 봐야지.”
당시는 냉전시대였고, 개방의 조짐도 없었다.
그때 이 회장은 중국을 이미 시장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80년 초에 이미 10년 후를 내다본 것이다.
그리고 1997년 드디어 초코파이가 서해를 건너 중국에 진출, 제과분야의 한류를 일으켰다.
초코파이시장은 이제 국내보다 해외가 더 크다.
당시에는 누구도 이 회장의 선견지명을 이해 못했지만, 결국은 그의 말대로 된 것이다.
[정리 = 김병수 기자]
출처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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